





본래 십자가형에는 어떤 종교적인 의미도, 어떠한 희망도, 어떠한 영감을 주는 요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형은 사람들이 ‘음란함’obscene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 즉 (옥스퍼드 영어사전에 따르면) “역겹고, 혐오스럽고, 더럽고, 악취가 나며, 구역질 나는” 감정을 느끼게 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로마 제국 전역에서 십자가형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때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타락한 범죄자, 저주받은, 짐승만도 못한 자가 하느님의 아들이자 세상의 구세주라 선언했습니다. 이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어떠한 기준으로도, 종교라는 기준에서 볼 때는 더더욱, 이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나자렛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선언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주장입니다. 이는 인간의 종교적 상상력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주장입니다. 대다수 사람이 받아들이는 영적 관념들로는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라는 낯선 관념에 이를 수 없습니다. —p.18~9.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쓰레기 취급 당하는 이들이 받는 형벌, 우리가 흔히 범죄자라 부르는 이들이 받는 형벌이었습니다. 좀 특별한 범죄자들, 영향력 있는 특권층 출신의 범죄자들은 결코 십자가형을 받지 않았지요. 이를 묵상해보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일과 정반대로 나아가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회에서 쓰레기 취급받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는 스스로 쓰레기가 되셨습니다.—p.32.
다시 한번,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예수께서 여러분을 위해 생명을 바치셨다고, 여러분이 그 정도로 소중한 사람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도적처럼 예수께 “예수님,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의 죽음은 도적들, 문명화된 세계의 반대편에 있는 “나쁜 부류”만을 위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순진함이라는 가면을 쓴 채 스스로 의롭다는 망상에 빠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분은 ‘우리 모두’를 위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p.41~42.
사람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제도 교회’를 질타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너무나도 타락해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 하느님을 향해 참회해야 한다면서 말이지요.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비판하는 이들이 고려하지 않은 중요한 속성이 있습니다. 자신이 해야 할 바를 하고 있다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는, 현실에 대한 견해가 완전히 다를 수도 있고, 심지어는 서로 대놓고 싫어하는 이들이 모인다는 점입니다. 성령이 함께하는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구성원들의 ‘다름’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호불호는 그리스도의 몸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그리스도를 옷으로 입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종도 자유인도, 남자와 여자”도 없고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p.54.
복음이란 무엇이니까? 그리고 복음이 아닌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신자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 말은 한편은 맞으면서도 한편은 틀립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를, 그가 어떤 차원에 속해 있는지를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그 이야기는 복음일 수도, 복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는 개정된 미국 성공회 기도서와 성서정과가 특정 문화, 신학적 경향을 반영해 우리를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만든) 그리스도 케리그마를 듣지 못합니다. 대신, 우리는 예수 케리그마를 듣습니다. 개정된 성공회 전례에서는 복음서를 낭독한 직후 설교를 전합니다. 이때 복음서 본문은 대부분 공관복음 중 하나이며 요한 복음서는 거의 채택되지 않습니다. 구약성서나 서신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스럽게 설교는 예수가 무엇을 했는지, 뭐라고 말했는지를 전하는 데 방점이 찍힙니다. 그래서 청중은 예수에 대해 들으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듣지는 못합니다. —p.134.